Kwak Sooyoung
About
-비평
“공간과 시간, 공간들과 시간들 속에서의 방황. 상황의 우여곡절 속에서 이것들의 유일한 끈은 운명이라 불리는 그 끈, 마법이란 이름의 그 고리, 마술적인 접속이다. … 순결한 시간에 대한 최초의 점유. 자신들의 운명밖에 가진 것 없는 이들의 무역사적 방황. 마법은 역사의 시간 밖에서 일어나는 상황들의 접합이다.”[1]
미셸 세르는 ‘헤르메스’에서 권력은 대지를 측정하여 공간에 기하학적 질서와 규범을 부여하므로 한 사회의 규범은 측정 단위에서 나온다는 점을 지적한다. 측정법에 들어맞지 않는 위치나 상황의 등장은 일탈 혹은 질서와 권력에 반하는 사건이 되는 셈이다. 사회가 규정한 질서와 계량에 들어맞지 않는 모호한 공간에 이른 자는 세르의 말대로 진로, 거리, 위치를 상실하게 된다. 이런 모호한 공간을 세르는 마법사의 공간, 아직 측량되지 않아 권력이 닿지 않았고 역사에 기입되지 않은 원초적인 공간으로 상정한다. 이런 공간은 현실에서 마주하는 시공간이 작용하지 않는 공간으로 예측할 수 없는 사건이 서로 충돌하거나 운명처럼 발생할 수 있다.
곽수영은 언젠가 영화 속 엑스트라들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전쟁 영화의 한 장면, 쓰러진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저들 각각이 가진 드러나지 않은 삶과 이야기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그가 의미한 그런 이야기가 영화가 설정한 세계 속에서 전쟁 이전의 삶을 영위해 왔던 소시민 누군가의 것일지, 혹은 예컨대 촬영 이후 세트장을 걸어나와 분장을 지우며 휴식을 위해 커피를 들이키는 인물이 펼치는 이야기일지 그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았기에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이와 비슷한 몇 가지 대화를 통해 유추해 본 바 그의 시선은 통상적으로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보다는 사소하거나 일상적이라서 지나치기 쉬운 부분, 가장자리나 잔여물로 남는 부분들에 가 닿는 것 같다.
예컨대 그림의 부분으로 나타나는 요소를 보더라도 뮤직비디오 무대를 만든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이 녹아있는 임시의 가벽들, 판넬들, 가로수, 교각과 광고판처럼 스쳐간 도시 풍경의 일부, 인스타그램 (영화) 속 장면들이 나타난다. 그가 경험한 부분적 기억 혹은 사물들은 그림 속 매우 구체적인 부분들로 첩첩이 배치된다. 그리고 배치된 부분들은 다른 크기와 약간 다른 모습으로 변주되어 또다른 그림에 등장하기도 한다.
곽수영의 그림을 작업노트를 참조해 요약하자면 현실에서 감각한 경험들의 축적, 즉 기억에서 길어 올린 이미지다. 기억은 작가가 현실의 규범과 질서에 속한 사물을 바라보고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것에서 근원한다. 작가의 시선을 경유해 저장된 기억들은 그림으로 선별되어 재배치될 때 작가에게 즐거운 놀이가 된다. 기억은 현실의 선형적 시간성을 벗어난, 그러니까 어느 특정한 좌표로 지정할 수 없는 무한한 공간에 위치하므로 세르가 말한 측량되기 어려운 공간과 닮았으며, 현실의 질서를 벗어나 새로운 배치와 접합을 시도하고, 그것을 통한 우연을 기대할 수 있으므로 마법이 일어나는 공간과도 상통하는 지점이 있다.
이번 전시에 이르러 기억의 거듭된 순환 과정을 겪은 그림들은 ‘분위기’의 개념을 넘어선다. 게르노트 뵈메의 ‘분위기’ 개념은 수년 전 곽수영의 그림을 설명하기 위해 빌어온 것인데, 요약하자면 그것은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을 넘어 주체와 객체가 맺는 관계 그 자체, 둘 사이에 벌어지는 현상의 총체다. 주체와 객체를 둘러싼 사건이 기억으로 형성되는 과정이 있고, 기억 속 이미지는 특유의 분위기와 함께 다시 그림의 일부로 소환되는 피드백 과정을 거친다. 그런데 새로운 기억이 무수히 수집되고, 기억이 기억의 각색과 그림으로의 소환을 통해 스스로의 이미지를 변이하는 피드백 과정이 무수히 거듭된다면, 분위기라는 개념으로 사물간 상호작용과 관계를 설명할 수는 있지만 그 상호작용의 승수효과나 피드백 효과까지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림의 근원인 기억으로 돌아가보자. 사람의 기억은 아이클라우드와 같은 저장소와 달리 어떤 정확한 시점에 저장한 고해상도 기록을 그대로 불러올 수 없다. 기억은 구름과 비슷하다. 구름은 바람과 증기, 먼지, 그리고 열에 의해 시시각각 모습을 달리하며 존재한다. 기억 혹은 구름을 이루는 전체는 셀 수 없이 많은 부분들로 이뤄지며, 이 부분들이 이합집산하며 영향을 주고 받는 관계 맺음을 통해 일부 지각할 수 있는 형상으로 나타난다. 경험-기억-그림이라는 과정을 통해 저장되고 출력되면서 순환하는 이미지의 피드백 과정은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복잡한 연산으로 이루어진 관계항이 된다. 새로운 접합과 배치를 거듭하며 변모하는 기억의 형태는 슈퍼 컴퓨터로도 예측하기 힘든 구름의 형태처럼 예측불가의 영역에 다다른다.
이러한 기억들의 관계성, 새로운 기억들의 등장, 그것들의 상호작용 등 기억으로 전개하는 시공간의 무한함과 복잡성을 인식한 결과인지 최근의 작품들은 전체를 상징하는 배경의 이미지가 자주 나타난다. 이는 분명히 기억의 순환 과정에서 파생했으나 예측불가의 형태로 나타나는 이미지들을 연결하는 장치로 여겨진다. 그림 속 꽤 큰 면적의 면이나 창의 형태로 나타나는 작품 속 구름, 하늘, 별, 물결, 점 등이 그것이다. 무한을 함의하는 이러한 배경의 등장은 구체적인 형상으로 그려진 다양한 사물(혹은 부분적인 기억의 이미지)의 배치를 감상하다가 다른 그림의 배치를, 즉 다른 캔버스가 보여주는 시공간의 세계로 이동할 때에 두 캔버스를 잇는 워프[2] 통로가 된다. 왜냐하면 변화무쌍한 구름, 아직 별자리로 이어지지 않은 숱한 별들, 분분하게 산포한 눈송이들과 점들은 여러 시간들과 공간들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방대한 기억의 세계를 가늠하게 하는 열린 공간에의 은유이기 때문이다.
작품 <밤 끝으로의 여행>에는 배낭을 매고 어느 먼 너머를 바라보는 여자가 나온다. 그림 상단에 산의 형상으로 구획된 밤하늘에는 별이 가득하다. 올라야 할 산꼭대기나 정상이라는 목표는 밤하늘로의 이미지로 이어지며 끝을 알 수 없게 아득히 멀어진다. 여자는 여행의 끝이 무한하다는 사실에 절망하기보다는 아마도 가능한 세계로의 여행을 계속 이어갈 갈 것 같다. 그리고 작가가 그릴 미래의 그림에서 여자는 약간 모습을 바꾸어 또다시 등장할 것이다. 빽빽한 도시 풍경을 배경으로 한 곽수영의 이전 그림에서 배낭을 매고 먼 곳을 응시하는 남자를 나는 이미 마주친 적이 있다.
[1] 미셸 세르, 이규원 역, 『헤르메스』, 민음사, 2009, p.379-380
[2] ‘warp’. 단어 자체는 공간 따위를 ‘휘다, 비틀다, 왜곡하다’라는 의미로 빛보다 빠르게 이동한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스타더스트 메모리즈> 박상은
-작가 노트
처음 게임을 접할 때 찾게 되는 공략집처럼 어떤 길잡이가 있다고 생각했다. 초입을 지나고 미로에 접어들어 함정을 피하고 탈출해 방향을 찾은 끝에 정해진 완벽한 결말을 얻는 과정 말이다. 하지만 내가 현실을 살며 발견한 사실은 바라는 완벽한 길은 없다는 것이었다. 마치 평행하게 움직이는 원자들이 기존 운동에서 비켜 가고 벗어나면서 일어나는 사건으로 원자들이 만나 새로운 세계를 생성한다는 개념인 클리나멘(clinamen)처럼 길은 계속 변하고 연결되고 생성된다. 현실은 모든 길과 방향을 포함하고 있다.
나는 기억을 그린다. 회화라는 매체가 수반한 재현을 어떻게든 돌파하고 싶었다. 변형된 재현이자 본 것의 재조합으로써 원본 없는 이미지를 생산하는 작업을 계획했다. 그 시작은 재현물을 없애는 것이었다. 무계획을 계획하기.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를 그리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처럼 실행하긴 어려운데 머릿속 검열관이 의미를 들먹이며 상기된 것을 그릴 필요성에 관해 묻기 때문이다. 작업은 시작되지 못하고 캔버스 앞을 맴돈다.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본다. 시대 정신을 생각한다. 말을 할 수 없는 그림을 그리며 세상을 바꾸기라고 할 듯이 의미를 찾는다. 그럴수록 내가 무엇을 말해야 할 지 모르겠다. 무슨 생각이 맞고 틀린 지 분간하기 힘들다. 무엇이 좋은 그림인지 기준이 모호해진다. 이미 만들어진 정답을 말해야 할 것만 같다. 하지만 정해진 답이 나에게도 맞는 것인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시작해야 알 수 있다. 옳고 그름의 사이 공간으로 길을 찾아 나선다. 우선 검열관이 개입하지 못하도록 색깔을 생각한다. 물감을 팔레트에 갠다. 색을 만들면서 어떤 장면이 떠오른다. 잊었던 기억이 스쳐 간다. 그 이미지를 붙잡으려 애를 쓰고 좇는다. 이미지는 도망가고 그 흔적을 추적하는 사이에 캔버스에서 형상이 출현한다. 방향을 종잡을 수 없게 앞뒤가 섞이고 부분 부분을 옮겨 그려 넣었기에 의미는 모호하지만, 대상은 선명하게 그려졌다. 어디서 보았을까? 어디서 들었을까를 생각하지만, 출처가 명확하지 않다. 대상을 좇으며 방황하는 과정 전체가 담긴 기억의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물이 수증기가 되어 구름을 형성하고, 구름 속의 물방울들이 서로 충동하여 합쳐져서 비, 눈, 우박으로 변해 처음 수증기가 된 지점에서 빗겨져 나가 다른 곳에 내린다. 내가 상기해 그린 기억도 이런 작용에, 운동에 하나인 것 같다.
내 화면은 여러 길이 교차하여 방향을 알 수 없게 된 백색 공간이자 어둠의 공간이다. 전시장에서 이미지들이 환유한다. 캔버스에서 캔버스로 이동하는 이미지는 전시 공간에서 기억처럼 작용한다. 관람자들의 고유한 사건과 환상이 결합하여 그림과 관계망을 이루고 분위기처럼 현실을 파악하게 한다. 관람객은 프리즘처럼 빛을 분리해 하나하나 색깔의 형상을 찾기도 하고, 볼록 렌즈와 같이 분리된 빛을 한 점으로 모아 실상을 만들기도 한다. 내가 드러내는 것은 차이로 빚어진 현실이다. 똑바로 맞닿지 못하고 미끄러져 환유하는 실재계, 환상과 실재의 뒤얽힘으로 만들어진 현실. 잠재된 가능성이 교차한 (초)현실이다.
<클리나멘> 곽수영
Selected Works
LayerOil on canvas 162.2 x 130.3cm 2022
방황하는 바위들 3Oil on canvas, 50.0 x 50.0cm 2023
밤 끝으로의 여행Oil on canvas 162.2 x 130.3cm 2023
모두의 동산 모두의 우주Acrylic on canvas 72.7 x 72.7cm 8EA 2023
대붕(大鵬)Oil on canvas 91.0 x 91.0cm 2023
대화Oil on canvas 91.0 x 72.7cm 2023
DaphneOil on canvas 91.0 x 61cm 2023
Soap operaOil on canvas, 130.3 x 193.9cm 2023
Exhibitions